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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생의 업, 한복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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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5-09-03 조회수 2243

평생의 업, 한복의 길

201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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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한복 디자이너 김혜순


15개 국가 23개 도시에서 한복 패션쇼
 드라마 황진이, 인수대비 등 의상 제작

삼촌 허영 선생 통해 한복의 길 걷게 돼
 바느질도 몰랐지만, 33년간 한길만 걸어


김혜순 대표 모습

▲ 25살부터 33년간 한복디자이너의 길을 걸어 온

 '김혜순한복'의 김혜순 대표. (출처=여성신문)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등 15개 국가 23개 도시에서 약 50회의 한복 패션쇼를 열고, 영화 ‘광해’ ‘천년학’을 비롯해 드라마 ‘황진이’ ‘인수대비’ ‘토지’ 등 18개 작품의 의상을 제작한 세계적인 한복 디자이너 김혜순(58·김혜순한복 대표)씨와 마주한 자리에서 한복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하지만 한복을 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 그의 인생이다. 스물다섯 살 새색시 시절부터 33년간 펼쳐온 한복의 세계는 넓고도 깊다. 격조 있는 디자인으로 전통 한복의 멋을 살리며 한복의 유행을 선도했다. 2013년 KBS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에서 의상 복원을 맡으며 다시 한번 실력을 인정받았고, LG ‘후’ 자생에센스 케이스, FENDI 바게트 백, 삼성 냉장고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2007년에는 문화관광부장관 표창을 받은 바 있다.


2시간여의 긴 대화는 자연스럽게 한복에 가 닿았다. 인생의 스승인 어머니의 이야기를 할 때도, 평생의 업을 물려준 삼촌 허영 선생의 이야기를 할 때도 한복은 함께였다.


정신적 지주, 엄마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김혜순이 자란 곳이다. 풀꽃과 곤충을 좋아했던 그에게 시골에서의 기억은 행복하게 남아 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다. 들에서 혼자 있길 좋아했다. 그때 접한 자연은 훗날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친구들과 놀고 싶으면 엄마와 같이 놀았다. 엄마가 놀아주시는 게 너무 좋았다. 엄마는 제일 좋은 친구였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특별한 것 같다.


“우리 엄마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못 다니게 됐다. 외할머니가 한 스님에게 우리 엄마는 학교 공부를 시키면 안 된다는 소리를 듣고 학교에 못 가게 한 거다. 가방을 뺏었다. 외할아버지가 담 뒤로 몰래 가방을 던져놓으면 학교에 가셨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굉장히 무서운 분이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오늘 뭐 배웠니’ 물어보셨다. 엄마에게 곱하기, 나누기를 가르쳤다. 늘 일기 쓰듯 엄마께 얘기했다. 시집갈 때까지 그랬다. 그런 대화 중에 책에도 없는 일들을 많이 배웠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


“우리 집은 마을 중앙에 있는 파란 기와집이었다. 그때는 동네 행락객이 많았는데 해가 저물어 묵을 데가 없어지면 동네 사람들이 ‘저기 청기와집에 가면 재워준다’고 할 정도였다. 엄마는 거두는 걸 좋아했다. 강아지도 주워와서 다 키우셨다. 하물며 사람은 어땠겠나. 그때는 싫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걸 배우게 됐다. 사람 공부를 하게 된 거다. 우리는 상을 차리면 항상 반찬이 똑같아야 했다. 생선을 구우면 그 사람들은 안 주면 좋겠는데 모자라도 똑같이 줬다. ‘남에게 서운한 마음을 먹게 할 바에는 안 주는 게 낫다’는 것이 엄마의 무서운 철학이었다.”


-그때는 불만이 많았을 것 같다.


“어렸을 때 심부름 다니던 기억이 많다. 시루에 떡을 찌면 칼로 나눠서 가운데 좋은 건 꼭 남에게 줬다. ‘가상이 것은 먹다 주는 것 같으니 그런 짓은 하지 마라’ 하셨다. 심부름 가면서 가운데 떡을 먹으며 손으로 쿡쿡 눌러놓고 그랬다. 집에서 거둔 사람 중에 좀 모자란 사람도 있었다. 동생들이 투정하면 ‘저 사람도 태어날 때 부모들이 신나했다. 너희도 만약 엄마가 없었다면 누가 거뒀겠느냐. 저 사람도 똑같이 나왔는데 어쩌다 보니 시절을 잘못 만나 이렇게 된 것뿐이다. 그걸 거지라고 질책하면 되겠나’ 하셨다. 지금도 너무나 쟁쟁하다.”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내신 것 같다.


“사업하시던 부모님을 따라 잠시 목포에서 산 적이 있는데 사업이 망했다. 5학년 때였는데 다시 시골 할머니 집으로 들어갔다. 굉장히 예민한 시절이었다. 그때 생각이 엊그제 같다. 내 마음에 ‘나는 빨리 커야 해. 우리 엄마가 망했으니까 빨리 커서 돈을 벌어야 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내에서 잘 살다가 오니까 외로웠고, 마음속으로 항상 등록금을 고민했다. 엄마는 그러시지 않았지만, 나는 가장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당당했던 엄마가 할머니한테 말 못 하고 당하던 게 생생하다. 30대 초반이었던 엄마는 집안의 짱짱한 할머니들 사이에서 이겨냈다.”


인생의 큰 지표, 허영 삼촌


김혜순의 삼촌은 한복 연구가이자 연기자였던 허영(1947~2000) 선생이다. 33년 전 김혜순에게 한복집을 차려준 것도 그였다. KBS 탤런트였던 삼촌 덕에 자연스럽게 방송국 일도 하게 됐다. 허 선생은 사람의 모습을 3분의 1로 축소해 한복을 입힌 한국 인형을 처음 만든 사람이다. 삼촌은 “나는 인형에게 옷을 입히고, 너는 사람에게 한복을 입히면 어떻겠니”라고 권했다.


김혜순 교수가 인형을 매만지는 모습

▲ 삼촌이자 한복 연구가였던 허영 선생의 인형을 매만지고 있는 김 대표. (출처=여성신문)






-삼촌이 한복과 연결해 주셨다.


“어렸을 땐 가까웠지만, 삼촌이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만나질 못했다. 결혼식도 알리지 못했는데 결혼하고 바로 다음 달에 삼촌이 만나자며 전화를 하셨다. 신혼집은 서대문이었고, 삼촌은 성대 입구에서 ‘예정 공방’이라는 한 평 반짜리 소품 가게를 하고 있었다. ‘공방 한번 구경 와라’가 이렇게 돼버렸다.(웃음) 20대 중반 한복집을 낼 때 ‘팔자 센 여자나 하는 거지’라고 반대하던 엄마에게 ‘누님, 시대는 변했어요. 이제 그런 시대가 아녜요. 걱정하지 마요’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정식으로 한복 공부를 시작했다.”


-삼촌은 어떤 스승이었나.


“바느질도 모를 때였는데 ‘바느질은 눈과 머리로 하는 거야. 기교는 사람이 다 할 수 없어. 너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니까 잘할 거야’라고 하셨다. 삼촌은 장인이었다. 자기 사람이 필요한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던 거다. 워낙 꼼꼼한 데다가 굉장히 섬세해서 주변 사람들이 못 견뎠다. 나는 이겨냈다. 고집도 있고 지지 않는 성격도 있었다. 하나를 시키면 될 때까지 했다. 한번은 ‘삼촌, 많은 조카 중에 왜 나를 골랐어’ 하니 ‘너도 아직 멀었어’ 하시더라. 칭찬을 한 번도 못 들어봤다. 삼촌에겐 철학이 있었다. ‘그냥 옷 파는 장사꾼은 되지 마라. 이왕 이 길로 왔으니 이 길에 너를 묶고 가거라. 배워라. 끝까지 배워야 한다’고 하셨다.”


-삼촌이 제자를 제대로 고르신 것 같다.


“삼촌은 인생의 큰 지표다. 지금도 하늘에서 지시하는 것 같다. 한번은 하도 힘들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울면서 그랬다. ‘삼촌이 하고 싶은 걸 내 몸을 빌려서 하고 있구먼!’ 삼촌이 하는 느낌이다. 나는 힘이 안 된다. 나는 별 볼 일 없는데 밖에선 김혜순 하면 대단한 사람인 줄 안다. 난 아무것도 아닌데 그걸 이기는 게 너무 어려운 거다.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걸 안 받아들이더라. 나보고 꾀병 부린다고, 할 수 있으면서 안 해준다고 하더라.”


여정의 마침표, 교육의 길


초등학교 2학년이 학력 전부지만, 김혜순의 정신적 지주였고, 배울 게 너무 많은 사람이었던 어머니는 18년 전 시골 동네 앞에서 교통사고로 숨지고 말았다. 그날 딸이 준 돈을 남에게 나눠주고 오는 길이었다. “네가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항상 네 생각이 맞았잖아”라고 하시던 어머니. 갑작스러운 이별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어머니와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으셨다.


“그때는 다 싫더라. 다 덮고 싶었고, 다 놓고 싶었다. 일하면서 조금씩 돈이 모이면 언제나 엄마께 드렸다. ‘혜순아, 은행 필요 없다. 은행은 언제 없어질지 몰라. 나한테 저금해라’ 하셨는데 엄마가 돌아가시니까 벌 이유가, 일할 이유가 하나도 없더라. 그동안 드린 돈으로 땅을 사 놓으셨더라. 그 땅을 나에게 남기고 가셨다. 바닷가다. 여수 바닷가. 한 포구를 야금야금 다 사놨더라. 지금도 그 땅을 찾아가고 늘 영감을 얻는 곳이 됐다.”


-어머니의 죽음 후 변한 것이 있나.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아무런 애착이 없어졌다. 내가 한복을 하면서 돈을 벌고 사업을 하는 것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허무할 것 같았다. 돈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갈 곳으로 가버린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가 쓸 만큼만 머물러 있다가 때가 되면 가는 게 돈인데 내가 돈을 향해 가면 허무할 거다. ‘그럼 뭘 남기고 갈까’ 생각했다. 이름도 필요없고, 어떤 혼을 남기고 싶었다. 교육이 제일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천 청암고에 디자인스쿨 ‘예정관’을 지으셨다.


“예전에 특성화고등학교 학생들의 기업 입사를 돕는 KBS 방송 ‘스카우트’에 심사를 나갔다가 순천청암고 학생을 뽑게 됐다. 그 인연으로 학교에서 특강을 하게 됐는데 가능성이 있는 학교였고, 아이들을 도와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라남도 교육청에 부탁해 예정관을 짓게 됐다. 물론 한복도 배울 수 있지만, 디자인을 가르치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 아이들이 너무 갈구한다. 작은 공방을 갖게 하고 싶다. 장인으로 길러내고 싶다.”


-어떤 곳으로 만들 생각인가.


“예정관의 ‘예정’은 예술의 경지라는 뜻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다. 배움의 터전으로 만들고 싶은 거다. ‘궁금한 사람은 다 와라’ 이런 취지였다. 요즘 아이들이 대학을 나와서 무슨 필요가 있나 박사학위자도 너무 많다. 시급한 문제는 취업이다. 노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런데 노는 사람도 문제다.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갈 곳이 많다. 취업을 못 한다는 말은 부끄러운 얘기다. 공방으로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싶다.”


-원광디지털대학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27세에 본격적으로 한복 공부를 하려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가정학과에 들어갔다. 당시엔 한복과가 없었기 때문에 한국 복식을 공부하게 됐다. 서울여대에서 석사를 하고, 박사는 원광대학교에서 했다. 학부에서 공부하면서 한복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보니 종교 복식 쪽이더라. 원불교 복식의 종교 복식 공부가 미학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원광디지털대학교에 한국복식과학재단을 설립하고 한국복식과학과를 만들었다. 겸임교수로 한국전통문양디자인과 왕실복식 착용법, 복식유물 재현 등을 강의하고 있다. 배우려는 학생이 정말 많다.”


-자녀들에게 이 일을 물려주고 싶은지.


“딸은 이탈리아에서 패션 공부를 끝내고 동덕여대에서 강의하며 ‘샐리드레스’를 운영하고 있다. 파티복 등 서양복식에 한식을 접목한 ‘한(韓) 드레스’다. 같이 패션쇼도 여러 번 했다. 태교가 한복이었다. 배불러서 맨날 인형 옷을 만들었으니. 아들은 경영학과 졸업반이다. 삼촌을 많이 닮았다. 굉장히 꼼꼼하다. 아들이 꼭 한복을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자녀가 아니어도. 나는 하겠다면 누구든지 준다. 그런데 배우다가 못 배우고 가버리더라. 수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내가 물려주는 게 아니다. 그냥 자기가 배우는 거다. 딸에게 항상 ‘얻어 가라’고 한다. 보고 배우는 거지 내가 가르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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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업, 한복의 길 [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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